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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 그룬호른을 다녀왔어요." 그들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대단하네요. 루트 상태는 어때요?" 산장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 바위에 확장볼트가 있어 하강도 가능하다. "우리는 지쳤어요. 어제 핀스터아른호른Finsteraarhorn (4,274m) 정상을 오르고 핀스터아른산장에서 출발해 그로스 그룬호른을 거쳐 이제야 도착했거든요. 루트는 대체로 괜찮지만, 3,400m 지점 하강 포인트의 바위가 심하게 흔들려요. 낙석 조심하세요. 파트너 없이 등반할 건가요? 혼자 간다면 길을 잘 찾아야 해요. 오늘 등반 중에 아무도 만나지 못했어요. 표식도 없고요. 혼자 등반하는 건 위험하지 않나요? 찰스 몬테이그를 아세요? 영국 소설가인데, 이런 말을 했어요. '등반은 인생과 다르지 않다. 다만 좀더 단순하고 안전할 뿐이다'라고요. 조심하세요. 행운을 빌게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면 고민하던 일들이 한없이 작아진다. 영국인 친구는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등반과 인생, 둘 중 어떤 것이 더 어려운가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하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인생'길이 난도가 더 높다. 영국알파인클럽에서 낸 <알프스의 4000m 피크>라는 책에는 각 산의 위험도를 계량해 난도를 적어 놓았다. 어려움에 따라 준비하는 장비목록도 정리해 놓았다. 각자의 숙련된 등반 경험과 난도를 비교해 산행을 계획하고 이 도전이 위험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실행한다. 등반은 위험관리구조Risk Management Framwork의 순환을 통해 실행해야 위험을 줄일수 있다. 해가 기울며 길고 고즈넉한 석양이 우리 앞에 고였다. 다음날 새벽, 헤드랜턴을 밝히고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콩코르디아플라츠 모레인지대를 지나 등산화에 크램폰을 채웠다. 1,200m를 올라야 하니 망설일 틈이 없다. 빙하지대에서 길을 찾기 어려웠지만, 그루네그피른GrUnneggfirn빙하를 따라 3,400m 지점까지 올랐다. 거대한 커니스를 지나 그루네그호른GrUnneggorn(3,863m) 정상에 도착했다. 멀리 오늘의 목표인 그로스 그룬호른이 보인다. 설벽에서 암벽으로 바뀌는 지점에서 길을 찾기 어려웠지만, 베르크슈룬트를 넘으며 길을 찾아갔다. 50m를 더 오르니 바위에 긁힌 크램폰 자국이 보였다. 반가웠다. 아무도 없는 백두대간을 걷다가 버려진 사탕 봉지를 발견한 등산객의 안도감이 이런 걸까? 정상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지만, 이윽고 목표한 봉우리에 섰다. 2016년 올랐던 그로스 피셔호른과 힌터 피셔호른이 보인다. 가져온 행동식을 먹으며 바람을 맞았다. 이제야 빛이 바람에 눕는 것이 보였다. 산장 테라스, 등산객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숨을 돌리며 일상을 비우고 흘려보내고 있다. 한국말이 들려서 돌아보니 월간<산> 취재팀 알프스의 4,000m 봉우리를 오르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8월이다. 물론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가능하지만, 고도가 높은 알파인지대나 바위에 눈이 많이 남아 있는 6월 말과 7월 초는 피하는 것이 좋다. 수준 높은 등반가에게는 해당되지 않겠지만 2024년에도 마터호른은 7월 중순까지 눈이 많아 사람들이 오르지 못했다. 하산을 서둘렀다. 매년 엄지발톱을 잃는다. 올해는 왼쪽이 먼저 빠졌다. 등반용 등산화를 꼭 맞게 신다 보니 하산길에 발가락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치수 넉넉하게 신으면 암벽에서 발 디딜 때 안정감이 떨어진다. 선택은 언제나 어려운 법이다. 착용감을 얻고 발톱을 잃었다. 발톱이 멍들고 빠지고 다시 나는 데 6개월 이상 걸린다. 온전히 자란다면 겨울 시즌, 스키로 정상에서 보인 핀스터아른호른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걸인은 다음 끼니를, 우리는 다음 산행을 걱정한다. 등반과 빙하횡단을 마치고 장비를 풀어 말리고 있다. 가벼운 장비를 선택하는 경량화는 등반속도에 영향을 준다. 산장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가 말해 준 지점까지 내려왔다. 냉장고만 한 바위에 확장볼트 한 개와 슬링이 보였다. 바위를 살짝 밀어 보니 불안정했다. 아침에 이곳을 올라갈 때 '그들이 말했던 곳이구나!'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흙벽에 바위가 박혀 있는 지형으로 눈 녹은 물이 흐르는 물길이었다. 오히려 로프하강보다는 10m 정도 클라이밍 다운이 안전했다.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발에 체중이 더 실리다 보니 디딜 만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몇 번을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설벽에 내려섰다. 크램폰을 등산화에 부착했다. 이제부터 산장까지는 올라 왔던 길을 걸어 내려가면 된다. 알레취 빙하 하단부. 피셔알프로 가는 출발점. 멀리 그로스 그룬호른이 보인다. 산장에는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등반은 예상보다 많은 13시간이나 걸렸다. 정상 아래 베르크슈룬트에서 길을 못 찾고, 너덜지대를 내려오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늦었다. 산장지기는 자리를 마련해 주고 따뜻한 스프를 내왔다. 허기진 배로 온기가 들어가니 긴장이 풀렸다. 산장 주인은 특별히 저녁 메뉴가 아닌 식초가 많이 들어간 새콤한 스위스식 샐러드도 주었다. 주인은 전날 내가 그로스그룬호른에 간다고 했는데, 식사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자 걱정했다고 한다. 정상에서 바라본 핀스터아른호른. 구름에 둘러싸인 모습이 신비롭다. 어디선가 한국말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었나 하고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월간<산> 취재팀으로 신준범 기자, 한국등산학교 한필석 교장, 동신항운 송진 대표, 주민욱 사진기자를 만났다. 그들이 융프라우 지역에서 취재를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콩코르디아산장에서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오랜만에 뵙는 분들도 있어 반가웠다. 그들은 융프라우에서 알레취빙하를 따라 피셔알프까지 22km의 빙하트레킹을 취재 중이었다. 여기 오기 전 신준범 기자와 송진 대표께서 도움을 주었는데 산중에서 만나니 더욱 반가웠다. 내일 하산 길인 피셔알프까지 가려면 오전 6시에는 출발해야 돼서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거대한 얼음강 그 위를 걷는 일은 신비로운 경험이다. 단단히 굳은 발아래 그 속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다. 걸음마다 들려오는 소리, 수만년의 비밀을 간직한 얼음이 내는 균열은 대자연의 숨결처럼 들린다. 단순한 색과 형태만 남아 있는 풍경 속에선 복잡함은 사라진다. 그저 자연 속에 놓인 하나의 존재가 된다. 여기에 서 있는 순간, 불필요한 감정과 생각은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다. 얼음 위에 선다. 빙하는 묵묵히 흐르고, 우리는 그 위를 걷는다. 등반은 인생과 다르지 않다. 다만 좀 더 단순하고 안전할 뿐이다 . info 위치:스위스 베르너 알프스 고도:4,044m 난도:PD+ 등반 거리:1,200m 등반 최적 시기:6~9월 주의사항:크레바스와 낙석 위험, 갑작스런 날씨 변화 월간산 3월호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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